라움콘, <환영>, 2023, 드로잉, pen on paper, 21 x 14.8cm
라움콘, <환영>, 2024, 영상, 8분 48초
라움콘, <환영>, 2024, 흰 점토, 130 x 60 x 50cm
환영, 라움콘
라움콘 Q레이터의 아버지는 1980년 대한민국 최초로 네팔 중서부 히말라야 산맥의 만시리 히말, 구르카 산괴에 위치한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봉우리 마나슬루(8,156m) 등반에 성공한 동국대학교 산악팀의 일원이다. 1975년 첫 등반이 실패로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와 평범한 직장인이자 아버지로 살아가는 어느날, 이인정 산악대장의 제안으로 1980년 네팔 마나슬루를 다시 올랐고 등반에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한국에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포함한 산악팀은 해외를 전전하다 귀국하였고 광화문 광장에서는 이들의 마나슬루 등반 성공을 기념하는 카 퍼레이드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카 퍼레이드를 경험하였던 Q레이터는 사람들이 성공을 축하하고 안전하게 되돌아옴을 기뻐하는 모습에 아버지가 등반한 마나슬루 산을 환영의 장소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장애를 갖게 된 Q레이터는 신체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장소, 마나술루를 가리키며 나의 산도 환영이라 한다.
갈 수 없는 장소가 되버린 산을 관찰하던 우린 아버지의 마나슬루 등반 경험 속 산의 풍경을 듣곤 기억의 산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산을 주목하였다. 구술로 전해듣는 마나슬루의 풍경과 가늠할 수 없는 산의 높이, 산사태로 죽음이 오고가는 등반의 과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듣게되는 마나슬루의 이미지는 숨가쁜 등산 중에 보이는 풍경처럼 생각되었다. 이후 우린 1975년과 1980년 마나슬루 등반과 관련된 사진과 뉴스, 일기장을 수집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기억을 소환하여 산을 관찰하고 나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산을 만드는 과정이 상상의 산을 오르는 등반이라 생각했기에 사실적 기록보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마나슬루 산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환영>(2024)은 Q레이터의 아버지이자 산악인 이영진(1947)의 1975년과 1980년 마나슬루 등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보았던 산의 풍경을 설명하는 인터뷰를 토대로 Q레이터가 자신의 신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산을 점토로 만들어가는 제작 과정이 교차 편집된 싱글채널 영상, 흰색 점토로 제작된 높이 60cm의 산 조형물 그리고 손 글씨 드로잉 “정복하기엔 너무 힘들다. 관찰하는 법. 그래, 그거다"로 구성되었다. 아버지는 영상에서 마나슬루의 풍경을 눈으로 가득한 웅장함과 더불어 눈사태와 *크레바스로 변화되는 산의 능선 그리고 이를 헤쳐내고 올라가며 마주하는 돌과 얼음으로 뒤엉킨 산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아버지의 설명과 함께 화면은 Q레이터의 등반 과정이자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영상에서 그는 넓은 좌대에 얇게 점토를 펴바르며 천천히 산을 쌓는다. 굴곡진 산의 능선을 왼손으로 더듬어 올라가며 위태롭게 솟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쉬지 않고 점토로 겹겹이 산의 모양을 잡아간다. 하얀 눈처럼 쌓여진 점토들은 흘러내리듯 엉겨붙어 덩어리를 만들고 말라가면서 빙하의 표면에 생긴 갈라진 틈, 크레바스처럼 자연스럽게 벌려졌다. 제작된 60cm 높이의 조형물은 “정복하기엔 너무 힘들다. 관찰하는 법. 그래, 그거다"란 손글씨 드로잉과 함께 설치되어 물리적 접근이 불가능해진 산을 다시금 등반하기 위한 태도를 선언한다.
어떻게 하면 산을 올라갈 수 있을까,란 물음에서 시작된 <환영>은 물리적 접근의 한계를 상상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해석하여 현실 경험으로 소환하는 여정이다. 아버지의 기억 속에 머물던 마나슬루가 나의 신체가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산으로 실제된 것처럼 제한적인 우리의 삶의 테두리가 유연하게 확장되길 기대한다.
*크레바스 :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게 갈라진 틈. 빙하는 문자 그대로 얼음(氷) 덩어리로 강(河)처럼 흐르는데, 빙하의 얼음이 흐르는 속도는 전체가 일정하지 않고 부위마다 다르다. 그래서 빙하에 응력이 걸려 틈새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크레바스'라 칭한다. 주로 빙하의 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는 곳에 생기기 쉽다. 경사가 급하게 진 곳이나 구부러진 곳, 기슭의 근처에서 흔히 발달한다.